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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부족한 시대, 랩·판소리로 사랑을 외치다


서울 종로구의 대안공간인 통의동 보안여관에 ‘사랑’을 주제로 래퍼와 소리꾼, 작곡가가 모였다. 숭고하게만 다뤄져 온 사랑을 민중의 목소리인 랩과 판소리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일 개막한 김기라·김형규 작가의 ‘X사랑’ 전시 퍼포먼스에 참여한 힙합 작곡가 차선수(35), 래퍼 아날로그 소년(35), 소리꾼 정은혜(35)는 모두 노골적으로 ‘사랑’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 파격적이자 부담이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전시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차선수는 “사랑이 부족한 시대니 사랑을 외칠 수밖에”라고 말했다.

그들에 앞서 시인 이상과 서정주, 화가 이중섭이 보안여관을 거쳐 갔고, 문학가 김동리·김달진 등이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어낸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내지 않더라도 여관이란 공간과 사랑이란 주제는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안여관 앞에 도착하기도 전, 메가폰을 타고 울려 퍼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외침이 먼저 들린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왈왈” 짖는다. 마치 사랑을 찾아온 이에게 사랑은 ‘개소리’라고 답하는 듯하다. 사랑이 뭔가. 여관은 인류애 혹은 피상적인 로맨스로 다뤄져 온 사랑의 개념을 탈피해 물질적인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공론장으로 끌어낸다.


“사랑이라고 해도 그건 아무리 팔아도 무일푼/ 나는 너의 어떤 것도 팔지 않지 않게 해줄 수 있어.” 여관 안으로 발을 들이니 근대기 번안소설 ‘장한몽’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로 심순애를 유혹하던 김중배의 대사가 랩으로 흘러나온다. 아날로그 소년의 랩을 듣다 보면 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김중배의 절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차선수는 “김중배의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며 “물질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김중배도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 반지밖에 없으니 그랬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곡에 대해 설명했다.



사회 참여적인 랩을 자주 써온 아날로그 소년이지만 이번 곡은 사회를 정조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도 결국 사랑의 과정”이라며 “시끌벅적한 광화문 뒤편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이번 전시가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사랑’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아티스트 자신들도 전시의 길라잡이가 되기보다 사적인 경험을 관객과 나누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여관 안에 흐르는 곡은 관객 각자의 경험과 어우러져 사랑이란 개념에 질문을 던진다.


한쪽에서는 판소리 ‘춘향전’에 ‘자장가’를 섞은 정은혜의 목소리가 문고리 소리, 낡은 바닥재를 밟는 소리들과 어우러져 여관 깊숙이 스며든다. 지난해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된 그는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랑인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다. 정은혜에게 사랑은 “고통스러운 치유 과정이자 숭배”다. 그는 “아기를 키우면 잠도 못 자고, 밥도 서서 먹고, 화장실도 못 가는 등 고통스러운 대가가 따른다”면서도 “아이의 웃음 하나로 모든 것이 치유돼 결국 아이를 숭배하게 된다”고 말했다.


보안여관에서 만난 세 명의 아티스트는 자리를 뜰 때까지 서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사랑의 범위가 넓은 만큼 무엇이라고 정답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재정의해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유롭게 펼쳐진 랩과 판소리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지 함께 상상하게 하며 여운을 남긴다. 전시는 25일까지며, 오는 24일 마지막 퍼포먼스가 한번 더 열린다.
/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