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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은 아닌데, 나랑은 잘 안 맞아

이십 대 초반엔 소개팅을 꽤 많이 했다. 비록 운명의 상대를 만나진 못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거기서 연애가 아니라 인생을 배웠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으며, 타인의 마음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고, 안 맞는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전부 소개팅을 통해 알게 됐으니까. 무슨 말이냐면, 대충 그 많은 소개팅이 다 망했다는 뜻이다.

그땐 정말 ‘아무나’ 만났다. 주선자가 “어떤 사람이 좋아?”라고 물어도 똑 부러지게 대답을 못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누굴 만나든 혼자 있는 것보단 낫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을 여럿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유독 또렷하게 기억난다. 칼바람 불던 초봄에 대학로 카페에서 만난 남자애였다. 걔랑 이야기하면서 언니들이 왜 이상형으로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을 꼽는지 이해했다.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자애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지갑을 가리키며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예쁘다”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지하상가 가판대였나 아님 시장이었나.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의미 없는 물건이었다. 아무튼 걔가 말하는 ‘브랜드’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지갑을 가방에 넣었다. 뒤이어 “좋아하는 브랜드가 뭐냐?”고 물었을 때도,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 스타일을 추천해줬을 때도 그저 대화 주제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 채 만난 지 3시간 만에 헤어졌다. 소개팅을 주선해준 친구에게 잘 안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 애는 본인이 더 아쉬워하며 말했다. “왜~! 잘 좀 해보지. 걔 옷도 잘 입고, 키도 크고 완전 인기 많은 앤데. 별로였어?” 아…. 그러고 보니 옷태가 남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미안했다. 자신의 멋짐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내 친구들 사이에선 이게 멋인데, 여기선 아니네?

그런 종류의 야속함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것 중 내가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건 별생각 없이 산 지갑이 아니라 공들여 고른 책이었다. ‘어쭈! 너 소설 좀 읽는 애구나’라고 알아봐주길 바랐는데(문학적 취향에 유치한 자부심이 있던 시기였다). 내가 그 애의 신상 운동화를 몰라봤듯, 걔도 나의 갈고닦은 취향을 알아채지 못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동경하는 것을 좇으며 산다. 그런데 아름답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사람마다 다르다. 오케이. 그렇다면 각자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지내면 참 좋을 텐데. 나와 다른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종종 어려워진다.

뭘 입는지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유행 지난 셔츠를 걸친 날 보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 취향이 있는 사람이 최신 가요 톱 100곡만 듣는 이를 남몰래 무시하는 것. 취향이나 가치관에 우열을 매기는 오만함을 옳다고 편들어 줄 순 없지만, 솔직히 이해는 간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경험한 것으로만 타인을 판단하는 편협한 존재니까.

사실 그 망한 소개팅을 한 직후에 애인이 생겼다. 나와 취향도 비슷하고 가치관도 맞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작정한 건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다. 걔랑 연애를 하는 바람에 한동안 ‘나와 잘 맞는 사람’에 대한 고민은 구석으로 치워 둘 수 있었다. 물론 연애 한정이었지만.

몰랐는데 애인이 생겼다고 해서, 나와 잘 맞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영원히 피할 순 없더라. 알바, 스터디, 조별과제, 인턴 생활 등 타인과 부대끼는 모든 곳에서 여전히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했다. 가끔은 백조들 사이에 낀 오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왜 그 사람들만 만나면 바보가 된 기분이 들까?

어떤 곳에서의 생활은 ‘아무나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성사된 소개팅처럼 엉망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인생과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자주 오해받았다. 뭘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당연스럽게 반복됐다. 나도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 사람들만 만나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소개팅 상대였다면 ‘나랑 잘 안 맞는 사람이네’ 하고 말겠지만, 불행히도 일주일에 다섯 번씩 꼬박꼬박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였기에 나는 매일 조금씩 시들어 갔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다. 마지막 즈음엔 나조차도 나를 의심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내 가치관이, 취향이 후진가?’

앞서 말했듯 내가 소개팅에서 배운 것은 연애가 아니라 인생이다. 나는 이제 안다. 아무나 만나면 망한다는 사실을!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과 어울려야 주눅 들지 않고 지낼 수 있다. 적어도 매일 만나는 사람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와 다른 이를 밀어내며 배타적으로 살겠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마음은 맑게 개기도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니까.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찾겠다는 뜻이다. 덧붙여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서로 너무 다르고 안 맞는다면 갈라서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인생인데.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주인 된 도리가 아닐까 싶다.